도자기

청화백자매화문 호

숙암(宿岩) 2020. 11. 2. 16:37

크기 : 26cm(가로)    21cm(높이)    14.5cm(입지름)   14.3cm(밑지름)

故 호산 안동오 선생님 작품

안동오는 생전 한국근현대도예계에서 백자분야의 대가로 불렸다. 경기도인간문화재로 활동하던 안동오의 고향은 굴비로 유명한 전라도 영광으로 이곳에서 고등학교까지 학창시절을 보냈다.

당시 선교사가 운영하는 미션스쿨을 다녔던 안동오는 선교사의 주선으로 일본의 와세다 대학 법학부로 진학해 다니다 3학년 때 학도병으로 끌려가서 해방을 맞아 학업을 마치지 못한 채 귀국하였다.

그 후 골동품 감정과 수리를 배웠고, 당시 시대상황이 국교 정상화가 이루어지지 않은 상태였기에 밀항으로 일본을 왕래하다가 잡혀서 나중에 추방당한 일화도 있었다. 한국전쟁이 끝난, 50년 후반 국내에서 골동품을 수리하고 감정하면서 한국 전통 도자기에 관심을 갖게 되었고, 결국에는 직접 도자기를 만들기 시작하였다.

당시 도자기가 전무한 상태였으나 미국에서 귀국한 이승만 박사가 대방동에 설립한 도자기연구소에서 해강 유근형, 도암 지순탁 등과 함께 수많은 실험을 하며 전통도자의 재현에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전통자기의 재현을 위해 여러 선생님들과 연구하면서 하나의 시편 실험을 위해 강원도까지 갈 정도로 애정을 보였다.

당시 이천에는 칠기 가마가 3~4개뿐이어서 마음대로 소성할 수 없는 어려움이 있었으나 당시 안동오는 드물게 빨리 자신의 가마를 가질 수 있어 많은 실험을 계속할 수 있었다.

특히 안동오는 일본인들과 많은 교류를 하셨기에 한 재일교포의 후원 아래 1962년경, 경기도 광주 번촌리에 “민속도자기연구소 안동오요”를 설립하여. 대방동 시절 도자기는 재현을 위주한 실험을 지속할 수 있었다.

처음에는 청자재현으로 시작하였으나 점차 분청사기, 백자 등으로 영역을 확대하였다. 그러나 그가 만든 백자색이 유난히 좋아 한참 청자재현에 열을 올리던 주변 도예가들과는 달리 백자에 천착하게 되었다.

65년부터는 작품이 나오기 시작하여 처음 백화점(신세계백화점) 납품을 시작하였고, 일본의 지인을 통해 일본에 많은 양을 수출하기도 하였다.

장작가마에서 백자를 구워내는 일이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기에 유난히 유색이 좋고 발색이 좋은 그의 작품을 구입하고자 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특히, 진사가 빨갛게 피어오른 진사작품들은 당시 안동오만이 할 수 있는 기술로 칭송받기도 했다.

70년대 중반까지는 재현품을 위주로 제작하였고, 백자는 주로 청화백자를 생산하였는데 이후에는 철화. 양각, 투각 등 다양한 종류의 백자로 작품을 발전시켰다.

당시에는 백자도 실패가 많았는데, 특히 투각은 초벌에서도 무너져 내리기 일 수였다. 그런데 안동오는 가스 가마로 제작하여 비교적 큰 크기의 투각작품들을 만들어 낼만큼 솜씨가 좋았다. 작품은 장작가마만으로 소성하다가 79~80년경에 가스가마로 소성하기 시작하였는데 그 때부터 거의 완벽한 작품들이 생산되기 시작하였다.

안동오는 문양이나 그림도 모두 개발하여 작품을 만들었다. 또는 그림 그리는 것보다는 조각을 엷게 해서 코발트를 넣어 긁어 낸 것을 선호하였다. 안동오는 생전에 후학들에게 습관적으로 만드는 것을 경계하고 늘 새로운 것에 도전하는 것을 멈추지 말라고 조언하였다.

그 덕분에 다른 요장에서 나온 것 보다 디자인이 한층 다양하게 생산되었고 그것이 안동오의 작품을 많은 도자애호인이 좋아하는 이유가 되고 있다. 그러나 가업을 잇는 직계가 없어 사후 관리가 되지 못하여 안동오의 작업은 계승되지 못한 채 방치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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