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소탐방

밀양영남루.표충사.영산정사

숙암(宿岩) 2014. 5. 14. 10:25

 

                                      

밀양영남루.표충사.영산정사

풍류와 시정(詩情)이 넘치는 곳~~! (밀양 영남루)



누(樓)란 건물의 사방을 트고 마루를 높여 지은 집으로 일종에 휴식공간이라 할 수 있다.


이 건물은 조선시대 밀양도호부 객사에 속했던 곳으로 손님을 맞거나 휴식을 취하던 곳이다.


보물 제147호. 원래 신라 법흥왕 때 세워진 영남사(嶺南寺)의 작은 누각 자리에
1365년(공민왕 14) 김주(金湊)가 창건한 것이다.



그후 여러 차례 소실과 재건이 거듭되었는데 밀양도호부의 객사 소속으로 된 것은 1611년(광해군 3) 객사를 영남루 북쪽에 새로 지으면서부터이다. 지금의 건물은 1844년(헌종 10)에 부사 이인재(李寅在)에 의해 마지막으로 재건된 것이다.


앞면 5칸, 옆면 4칸의 팔작지붕을 한 중층 누각으로 건물의 기둥이 높고 간격을 넓게 잡아 규모가 크고 당당한 느낌을 준다. 마루가 넓게 깔린 2층 평면은 내외진(內外陳)으로 구성되었으며 주위에 난간을 두르고 기둥 사이의 사면을 모두 개방했다.


공포는 익공양식의 건축으로는 가장 쇠서가 많은 3익공계이고, 천장은 지붕 밑이 그대로 보이는 연등천장에 겹처마 형식으로 처리해 꾸며졌다.


영남루의 동쪽에는 능파각(凌波閣), 서쪽에는 침류각(枕流閣)이라는 2채의 부속건물이 있는데 그 중 낮게 위치한 침류각은 3단계로 낮아지는 계단건물로 연결되어 있어 전체 외관에 변화와 조화를 추구한 점이 주목된다.


'영남제일루'(嶺南第一樓)라고 편액된 누각답게 밀양강을 끼고 절벽 위에서 굽어보는 주변 경관이 뛰어나 진주의 촉석루(矗石樓), 평양의 부벽루(浮碧樓)와 함께 조선시대 3대 누각으로 불린다.


표충사는 임진왜란 때 큰 공을 세운 사명대사의 충혼을 기리기 위하여 국가에서
명명한 절이며, 대한불교조계종 제15교구 본사인 통도사의 말사이다.
사기(寺記)에 의하면 654년(진덕여왕8년, 무열왕元년) 원효대사가 삼국통일을 기원하고자
654년 창건하고 죽림사(竹林寺, 竹園精舍)라 했으며, 829년(흥덕왕 4) 인도의 고승인 황면(黃面)선사가 석가모니의 진신사리를 봉안할 곳을 동방에서 찾다가 황록산 남쪽에 오색서운이 감도는 것을 발견하고는 3층 석탑을 세워 사리를 봉안했다.
서기 829년 신라 흥덕왕 4년에 왕의 셋째 왕자가 몹쓸 병을 얻어 전국의 명산과 명의를 찾던 중 이곳의 약수를 마시고 황면선사의 법력으로 쾌유되어 왕이 친히 찾아와 크게 칭송하니 선사가 말하기를 "이곳 유수와 산초가 모두 약수요, 약초아님이 없습니다."라 말하니 왕이 기뻐하고
절 이름을 재약산 영정사(載藥山 靈井寺)라 명명하고 절을 크게 부흥 시켰다.



중요문화재로는 청동은입사향완(靑銅銀入絲香 : 국보 제75호)·3층석탑(보물 제467호)·
대광전(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131호)·석등(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14호) 등이 있다.
일주문을 지나 酬忠樓(수충루)를 들어서면 멀리 보이는 사천왕문 사이로 경내가 살며시
그 모습을 드러낸다. 이 수충루는 밀양시 교동에 있는 밀양향교 풍화루와 부북면 후사포리에
소재한 예림서원 독서루와 더불어 다른 사찰에서 볼 수없는 서원의 정문 형태로 된 누각이다.
사명대사는 서산대사의 제자로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스승을 도와 의승병을 일으켜 평양성 탈환의 중요한 역할을 하였으며 나라를 구하고자 서생포 가등청정의 적진으로 네차례나 회담을 하기 위해 들어 갔고 1597 정유년 외장 가등청정이 "조선에 국보가 있느냐?"고 묻자 "가등청정
당신의 목이 바로 조선민족의 국보다."하고 할을 하며 적장의 간담을 서늘케 하였다.



1604년 2월에 스승이신 서산대사의 부음을 받고 묘향산으로 가던 중 선조의 국서를 받들고 8월 일본으로 탐적사(강화정사)로 가서 8개월 동안 각고의 노력끝에 포로로 잡혀간 동포 3,000여명과 함께 귀국하는 등 외교적 업적을 남겼다. 그 해 6월에 선조에게 복명하니 가의대부(嘉義大夫) 영의정을 하사 받았으나 3일 만에 관직을 사양하고 그 해 10월에서야 스승이신 서산대사의 영정에 분향 참배하고 다시 합천 해인사에 들어가 결가부좌한 채 무량선정에 들다가 광해군 2년(1610) 열반에 드시니 법랍 51년 세수 67세이며 시호는 자통홍제존자(慈通弘濟尊者)라 하다.
당시 조정에서는 국장으로 장례를 지내고 밀양 표충사(祠)와 묘향산 수충사(祠)에 서원 편액을 내리며 유교식 제향으로 봉행토록 했습니다.



숭유억불 조선시대의 당시 사회로서는 승려에 대한 파격적인 예우였던 것이다.
또한 사명대사가 태어났던 밀양 무안면에 표충사당과 표충비 이를 수호할 표충사를 지었다.
그 후 오랫동안 당쟁으로 조선의 중신들은 구국의 영혼인 삼대성사들을 까맣게 잊고 있다가 1839년(헌종5년) 사명대사의 법손(法孫)인 월파당 천유(月坡堂 天有)선사가 임진왜란 때 공을 세운 사명대사의 충혼을 기리기 위해 예조에 소청을 올리면서 무안면에 있던 표충사(表忠祠)를 그 당시 폐사로 있었던 영정사 경내로 사당과 서원을 옮기면서 가람배치가 크게 변하고 절 이름도 표충사로 고쳐 부르게 되었으며,



현재 이곳에는 중앙에 사명대사 동쪽에는 그의 스승인 서산대사, 서쪽에는 임란 때
금산전투에서 800 의승병과 함께 장렬히 전사한 기허당의 영정을 함께 모심으로 삼대성사를
추모하는 서원이면서 그 관리와 제향을 사찰에서 맡는 유불의 이원적 구조로서 불교의
호국사상과 중생구제사상 그리고 유교사상의 의(義)와 공존하게 되므로 표충사(寺) 안에는
표충사(祠)와 표충서원이 있게 되었으며, 본사인 통도사와 더불어 동부 경남을 대표하는
명산 대찰인 것이다.



고려 문종대(1047~82)에는 당대의 고승인 혜린(惠燐)이 이곳에서 수도했고,
충렬왕대(1275~1308)에는 〈삼국유사〉의 저자인 보각국존 일연스님이 주석하고
천의국사가 대를 이어 주석하면서 불법을 크게 중흥하니 1286년 충렬왕이 '동방제일선찰'
이라는 편액을 내렸다.





2014년 2월 12일
한국의 3대 아리랑 문화교류를 위한 밀양․진도․정선교육지원청 업무협약이 있었습니다.
행사는 업무협약식,학교방문, 유적지 탐방 순으로  함께 수행하며 찍은 사진입니다.

업무협약의 주요내용은 ★ 유네스코 인류무형유산에 등재된 3대 아리랑의 우수성을 홍보하고
                                   ★ 아리랑의 문화교류를 통한 교육적 성과를 높여 장차 아리랑 지킴이를 양성하며
                                   ★ 아리랑 인류무형유산 등재 2주년(2014.12.6(토)) 기념, 3개 교육지원청
                                                                      공동행사 추진을 협력하는 내용이 담겨 있습니다.

행사의  모든것을 주관하신 밀양교육지원청 신진용교육장님,장학사님.손정식주무관님께 깊은 감사를 드리며
진도교육지원청 최은식교육장님과 한병준 주무관님께도 고마움을 전합니다.

무위수석 회원님들~~!  
우리민족의 아리랑 많은 사랑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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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밀양영남루.표충사.영산정사


사진가: 숙암 (최원규)

등록일: 2014-02-20 09: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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